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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동

안심동(安心洞)의 유래

후백제의 견훤은 원래 상주 고을 가은현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백제 왕의 악몽을 갖고 천하를 병탕코자 공산동 수대전을 시정함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정기 5천명으로 공산 아래서 맞아 대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장사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제군이 패배함으로 왕건은 난을 피하여 지금의 동내동까지 이르니 적국의 추격이 없으므로 한줌의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게 되니 이 곳을 안심(安心)이라고 불렸다.

반야월

반야월이란 명칭은 여러 가지로 옛날부터 불러왔으나 후삼국시대 왕건이 견훤군사에 패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서 이곳을 반야월이라 했다고 하며, 이조 19대 숙종께서 민정을 관찰하기 위해 전국을 순시하던 중에 이 고장에 이르러 반달이 서산에 기우는 야반중에야 희미한 달빛을 따라 한 동리를 찾으니 이를 반야월이라 하였다.

신기동(新基)

신기동의 옛셋터라 불러왔고 평단한 지면에 북에서 다소 남으로 경사를 갖고 강우량은 모름지기 금호강으로 흘러가며 한양으로 가기위한 반야월역 주변 하주막을 중심으로 샛터를 만들어 영농 경작토록 하여 붙어진 이름으로 동래정씨, 달성배씨가 많이 살고 있다.

말방샘

청정한 생수가 용출하여 산를 이룬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이 목욕을 하고 폭서를 식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율하동 1007번지에 보존되다가 매립되었다.

율하동(栗下)

처음에는 팔공산 원수가 청결하여 반계동이라 하다 율하천변 밤나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밤수확 후 유희 장소로 이용하여 농사 경작금액을 의논하는 장소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지역에는 강갱이라는 샘이 있어 여름에는 차가운 물,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솟아났으며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일명 말방샘이라고도 하였다.

용계동(龍溪)

금이 났다는 전설마을 금계리(金溪里)와 5정승이 났다는 오용리(五龍里) 전설에서 용자와 계자를 합쳐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달성배씨가 많이 살고 있다.

상매동(上梅)

임진왜란시 성주여씨가 피난와서 정착한 마을로 원래는 피난온 선대를 따 송하리라 칭하다. 그 후 밤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율상리로 호칭하였고 주의의 산이 희다 하여 매화 '매'자를 삽입하여 율상리의 '상'자와 '매'자를 합한 상매라 불리어지고 있다.

매여동(梅余)

매화꽃 형태로 주위산이 오목하고 흰모래(마사토)로 형성된 산이 대부분인 관계로 매화 매(梅)와 여(余)를 붙여 매여라 하였는데 지금도 골짜기에는 가마터 흔적이 남아 있다.

돈지봉(豚智峰)

돈지봉 명칭은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山(보우리)밑으로 돼지를 주업으로 하는 농가들이 형성되었고, 그 돼지를 생계수단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하여 돈지봉이라 불리고 있다는 설이 있다.

내곡동(內谷)

냇가 계곡에 갈대가 무성하여 노곡 또는 노실이라 불려지다 골이 깊다 하여 내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복·대림동(司福·大林洞)

시인과 문한이 많이 배출하였다 하여 시동(試洞)이라 불려지다가 동족 작은시동은 복을 받은 동네하여 사복동, 큰 시동은 동네가 크고 숲이 우거졌다 하여 대림이라 불려졌다.

숙천동(淑泉洞)

맑은 샘이 서너군데 있다 하여 숫샘이라하다 현 숙천초등 교정에 물이 차고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지게 된 이름이다.

동내동(東內洞)

팔공산 초례봉 줄기 따라 서편쪽을 신서동, 동편을 동내동이라 하여 불러지게 되었다.

괴전동(槐田洞)

옛 이름은 괴명골로 조각품으로 쓰이는 괴목나무 밭이 많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동(琴江洞)

처음에는 냉천으로 불리어졌으나 금호강의 물이 차고 맑은 동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호·서호동(東湖.西湖洞)

반야월 초등학교 북편에 작은 호수가 있어 그 동쪽을 동호, 서쪽을 서호라 하였다는 설과 초등학교 동쪽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어 동쪽을 동오, 서쪽을 서오라 칭하다가 음운 변천에 의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각산동(角山洞)

우암동이라 불리어오다 송시열 후손이 하양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선조와 같은 호라 하여 우를 뿔 각(角), 바위 암을 뫼 산(山)으로 고쳐 불렀다.

신서동(新西洞)

원래 순 우리말인 덤밑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마을 동내동 서편에 신촌이란 마을이 생긴 후 동내동을 동곡, 신촌을 서곡이라 부르다 230여 년 전쯤 문화 유씨가 정착한 이후 새로운 서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곡지(東谷池)

이 못은 내상동의 서편 승방골 하단에 위치하여 해방 전 착공했으나 완성을 못보고 해방 후 누차 시공하여 1961년 준공을 이룩하였다.

송정(松亭)

동리 중심부 소나무 정자가 큰 것이 있다하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임란을 진압하고 귀국할때 팔공산 산세를 보고 조선땅에 큰 인물이 날것을 두려워 맥을 끊었는데 끊은 자리에 미륵불이 솟았다 하였으며 지금도 높이 2m, 폭 80cm 의 화강암으로 된 석불이 명동 입구 철로 건널목에 있었던 것을 해방 후 농어촌개발공사 자리로 이설, 안치하였다.

가남지

옛날 가남사란 사찰이 있었는데 빈대비력이 극성으로 만연되어 도저히 이를 구축할 방법이 없어 사찰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유지로 이용해 오다가 일제시대 1939년 기유해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당시 공무원이 주축이 되어 지주의 기부금과 주민의 노력동원으로 확장·준설하여 금일까지 아무 하자없이 사용하고 있다.

중리(中里)

숙천과 내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중리 달성서씨 및 성주배씨가 거주한다.

새금지

숙천과 내곡동 경계간에 있는 못이다.

활감지

내곡동의 동난구릉에 위치한 못이다.

초례산

이 산은 해발 635.7m로서 안심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환성산맥을 남으로 따라 내려와서 남향으로 위치한 산으로 산정은 소곳끝 모양으로 생겨 사람 몇 명이 겨우 앉을 정도이며 산정아래 동·서·남이 급한 경사이다. 옛날에는 산정이 초목이 거의 없고 백산(百山)이었는데 일제시대나 광복 후 사방사업을 실시해서 지금은 표면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또 일설에 초례산 산정에는 바위가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데 그 앞에는 편편한 또다른 바위가 있어 그 곳에서 초례(결혼식)를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이 있어 초례산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동골

의미는 동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내(동골)·초례봉 줄기를 따라 서편에는 서골, 동편에는 동골이라 불리어졌으며 서골은 현재 신서동으로 동골은 동내동이라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조 중엽쯤 장수황씨가 개척한 마을이며, 영사재와 동호재의 황씨 재실이 있으며, 황씨의 일가 친척들이 거주하는 집성촌이다.
페이지 담당자
최종 수정일
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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