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따뜻한 공동체 내일이 더 기대되는 동구 로고 이미지

동구안내

신천동

신천동(新川洞)의유래

신조선시대 정조 3년 대구판관 이서가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던 하천에 제방을 쌓고 현재의 신천동 물줄기를 돌려 만들었는데, 새로난 하천(신천)의 가장자리에 있다 하여 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천

  • 대구시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하천으로 남부 산지인 비슬산 최정상에서 시작하여 용계동(가창면 소재)에 이르러 팔조령 부근에서 시작하는 대천과 합류하여 대구 시가지를 가로질러 침산동에서 금호강으로 합류된다. 주류의 길이 12.5㎞, 유로 전체길이 27㎞, 유역면적 165.3㎢의 준용하천이다.
  • 서부 구릉지와 동부 구릉지 사이에서 여러 차례 유로를 이동 흑은 분류하면서 큰 선상지를 형성하였고 이 선상지 위에 대구 시가지의 중심부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의 위치로 강줄기가 잡히기 전에는 용두산 밑에서 효성타운 - 수도산 동쪽 - 반월당 - 구암서원 앞 - 동산파출소 - 달성공원을 통과하여 달서천으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금호강과 합류하는 강이며, 비가 오면 시가지 침수를 피할 수 없었다.
  • 이러한 물난리를 막지 못하다가 영조 52년 7월 판관 이서(李逝)라는 분이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임기 3년째인 정조 2년(1778) 사재를 털어 시가지로 물이 유입되지 않도록 제방을 쌓으니 물난리를 면할 수 있었고, 이 때 물줄기의 형태가 변해 새로이 생긴 곳이라 하여 신천(新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천의 상류부 오동(梧洞)에는 상수도용 가창저수지가 만들어져 대구시의 상수원이 되고 있으며 상류 산간 계곡은 대구시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한골

난리골의 뒤쪽이라 한다. 명칭의 유래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으나 현 광명아파트가 있는 곳이 큰 골인데 그 곳과 난리골의 뒤쪽이었다.

송라시장

신암2동 범화맨션 근처는 일제시대에는 검찰청 산하 관청이 모여 있던 곳이다. 해방이 되고 20년 후 개인에게 이 지역이 불하되어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동네를 이루었으며, 그 때 행정구역은 대구 동구 신암4구였었다. 이 동네 동쪽의 조그만 골짝기에 남쪽과 북쪽에 각각 연못이 하나씩 있어서 쌍둥이 못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못은 이덕삼씨의 개인소유였다고 하나 못 둑에는 출처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개인 공적비가 15개 정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없어졌다. 지금은 두 못의 사이에 경부선 철도가 동서로 놓여져 있다. 철도 남쪽에는 못이 메워져서 처음에는 골목시장으로 시작하여 해방 전까지는 영남시장이라고 했으나, 해방 후부터는 송라시장으로 불리어졌다. 철도 북쪽의 못은 1950년대까지 빨래터로 주로 사용되다가 1960년대에 메워져 이 자리에 지금의 동신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야시골

일제시대(1910년) 이후 현재 신천4동 그 일부가 묘지(墓地)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묘터가 야시(여우)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데서 그 유래가 있다.
페이지 담당자
최종 수정일
2023-12-18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