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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history

  • 1958. 1. 1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에서 대구시로 편입
  • 1963. 1. 1 대구시 공산면에서 달성군으로 환원
  • 1979. 3. 1 공산댐 건설로 현 청사로 신축이전
  • 1981. 7. 1 대구직할시 승격으로 대구직할시 공산출장소로 편입
  • 1982. 9. 1 대구직할시 공산출장소 관할구역내에 공산1동을 분동
  • 1983. 3.15 대구직할시 동구 공산출장소를 폐지하고 공산2동을 신설
  • 1995. 1. 1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2동( 법률 제4789호 )
  • 1998. 9. 1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1·2동을 공산동으로 명칭 변경
  • 1999. 9. 1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주민자치센터 개소

동명유래

공산동(公山洞)의 유래
지경(地境)
경산군과 달성군의 경계를 이룬다는 뜻과 갓바위에 석조불을 창건할 당시 임금이 머물렀던 지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송정(月松亭)
유인이 밤길을 가던 중 마을 뒷산 좌우에 노송이 울창 야경의 소나무 경치가 더욱 멋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도장골(道臧骨)
약 1500여 년 전 신라시대 스님이 몸을 숨긴 지역이라 하여 도장이라 명하고 건립한 사찰을 도장사라 하였으나 사찰은 없어지고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이 이름이 현재 불리어오고 있다.
학부마을 (鶴浮)
팔공산 학수암에는 큰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하여 붙여졌으며 외학부, 내학부로 나누어 졌으나 내학부 마을은 현재 없어지고 외학부가 학부마을 이루고 있으며 일명 "학봉"이라고도 한다.
백안(百安)
마을 형상이 배 모양 같다 하여 배안이라 하다 마을호수가 100호 이상 되자 100호 모두가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백안으로 불려졌다.
속골
고려시대에는 큰 소골이라 하였고 숙종 때는 둔기고 둔곡이라 부르다 1910년경 속골로 변하였다.
수태골(水台滑)
이 마을 옆 내가의 물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하여 수태라고 하게 되었다.
용천(龍泉)
마을에 지정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근처 동굴 안에 용이 살고 있었으며 이 용이 굴 앞 용수를 먹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용천이라 불리어졌으며 약 100여 년 전에는 갈방 또는 가루뱅이라고도 불려졌다.
국실(菊室)
처음에는 부인사의 소재지로서 부인동이라 하다 마을 오른쪽 산에 벌봉이라는 봉우리가 있고 벌이 많이 서식하고 들국화가 많이 피어 있어 벌이 국화를 좋아한다는 뜻에서 국곡으로 불리다가 국실로 변하였다.
미대(美垈)
조선 명종 때 채송표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미대라 명명하였는데 당시 이 마을에 있었다는 미대사라는 사찰이름도 같은 연유이다.
구암
약 200여 년 전 현동수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옆에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어 구암이라 불렸다.
지묘동(智妙)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장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자 신장군의 충성심을 알고 왕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 자리에 지묘사라는 절을 세웠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송정동(松亭)
마을 중심에 소나무 정자가 큰 것이 있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며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사 이여송이 왜란을 진압하고 귀국할 때 팔공산 산세를 보고 조선 땅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 맥을 끊은 자리에 미륵불이 솟았다 하였으며 지금도 높이 2m, 폭 80㎝의 화강암으로 된 석불이 현존하고 있다.
노적봉
노적단(볏섬)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생긴 봉우리라 하여 노적봉이라 한다.
성인봉
성인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 하여 성인봉이라 하며 현재 봉우리에 발자국이 있다 한다.
관봉
멀리서 보는 산형태가 갓모양같이 생겼다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옥정동
구슬같이 맑은 샘물이 사시사철 나온다는 유래에서 옥정이라 한다.
중심
신무·용수·미곡동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심이라고 불리웠다.
상중심
중심의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상중심이라 한다.
동산마을
현재는 산이었던 흔적만 남아 있으나 동네의 동쪽에 조그만 동산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동산마을이라 한다.
지장지
북지장사 절터를 닦을 때 땅속에서 부처가 나왔다 하며 북지장사에 있는 못이라 하여 지장지라 한다.
자리미
마을 뒷 동산이 자라의 목같이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모고지
마을 앞에 모과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는데 유래되었다고 하고, 일명 목과정이라고도 한다
중마을
스님 가족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모래정
모래가 많다는 데에서 유래, 일명 거(巨)듬이 라고도 한다.
양방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데 유래되었다.
도마재
산 모양이 도마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성둑 옛성터가 있던 곳에서 유래하였으며 현재 성터의 흔적이 조금 있다.
안양배이
안쪽에 있는 양방이라는데에서 유래되었다.
큰마
능성부락 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인산
어진산에 어진 인재가 많이 난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당동
국수당 고개에 사당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성두뜰(성둑)
지금은 인가는 없으나 옛날에 성의 둑을 쌓은 곳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대왕재(댕재)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격전하다가 패한 후에 그 고개에서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대왕재라고 불렀다.
상리(上里)
높은 산기슭에 입지했다고 상리라 불리워진 듯 하나 일설에는 공산면 서촌에서 제일 먼저 집터를 잡았다 하여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
  • 자료담당부서 공산동 한재복
  • 전화번호662-3984
  • 최종수정일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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